독일 바이에른주(州) 퓌센을 가다. - 노이슈반슈타인 성, 호엔슈반가우 성

 
이번 여행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독일 바이에른 주 퓌센으로 이동하는 여정이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A8 고속도로와 B472 도로를 이용하면 3시간 거리에 독일 퓌센이 있다.

독일 바이에른 주 퓌센에는 호엔슈반가우 성과 디즈니 성의 실제모델로도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있다.

 

 

독일 퓌센으로 가는길에 비가 조금 내리고 있다.

독일의 작은 마을답게 고즈넉한 풍경이군.

 

 

퓌센으로 향하는 길에 어느 마을로 들어가 길가의 풍경을 담아 봤다.

 

 

 

도로 양옆에 펼쳐지는 중세 유럽의 작은 마을들이 보기 좋다.

 

 

 

이곳은 소나 말들이 자유롭게 뛰어 놀법한 풍경인데 동물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지나가는 차가 많지 않아 시원하게 달리며 이국적인 농촌 마을의 정취에 취해본다.

 

 

멀리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가는 길에 호엔슈반가우 성이 있다.

 

호엔슈반가우 성은 루트비히 2세가 태어나 17세까지 자란 성으로, 바이에른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으며 루트비히 2세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시절을 보낸

호엔슈반가우 성을 잊지 못해 많은 시간을 이 성에서 보냈다고 한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노이슈반슈타인 성 못지않게 아름다운 성이다.

 

 

호엔슈반가우 성 (Hohenschwangau)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가는 길에 호엔슈반가우 성을 카메라에 담아 본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가는 방법은 3가지이다. 마차, 버스 그리고 튼튼한 두 다리.

뚜벅이는 올라가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주위의 풍경과 많은 관광객들과의 동행은 힘든 느낌을 지워버릴 수 있다.

어느정도 걸으니 노이슈반슈타인 성 윗부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성이 워낙 커 전체를 담을 수 없어 일부분만 찰칵..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ß/Schloss Neuschwanstein)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신 백조 석성'(新白鳥石城)의 의미이며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가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이다. 

 

바이에른의 왕 류트비히 2세의 부왕이었던 막시밀리안 2세는  '백조의 성'이라 불리던 폐성 호엔슈방가우 성을 사들여 고딕 양식으로 개조, 재건축하였고,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가 이곳에서 자랐다. 때문에 루트비히 2세는 어렸을 적부터 건축에 대해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또, 그는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바그너는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토대로 한 오페라 작품들을 썼고, 이 때문에 루트비히는 게르만 민족의 신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호엔슈방가우 성은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모두 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걸맞은 새로운 건축물들을 건설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 기획은 1862년 그가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하기 전 뮌헨 왕궁의 통로에 바그너가 쓴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장면을 벽화로 그렸다. 그리고 자신의 궁전을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하고, 치엠 호수에 베르사유 궁전을 본딴 궁전을 짓게 하는 등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 때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바그너를 다시 불러 자신에 구상에 가담시켰다. 그러나 대리석 465톤, 기타 석재가 1,550톤, 벽돌 40만개 시멘트 600톤으로 지은 이 성으로 인해 국고가 낭비되어 재정 상황이 좋지 않게 되어, 국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를 축출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일로 루트비히 2세는 의욕상실에 빠졌고, 퇴위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구상을 떠올리면서 다시 생기를 찾았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 바르트부르크 성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이와 같은 성을 호엔슈방가우 성 맞은 편에 지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지역은 지형이 험해, 그의 계획대로 성을 지을 수가 없었다. 이에 성은 당초 계획과 다른 새로운 형태로 수정 계획되었고, 1868년 건설작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루트비히 2세는 교권 강화를 둘러싸고 관료들과 마찰을 빚게 되면서 정치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광적으로 건축에 몰두했다. 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외에도 다른 여러 곳에 건축물을 짓게 되면서 국고를 낭비하고, 수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의료진으로부터 정신병자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왕위에서 퇴위당했고, 퇴위당한 지 3일 만에 슈타른베르거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사인은 자살로 공식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많은 의문점을 낳고 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1892년 완성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성의 완공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대포의 발명으로 성이 이미 쓸모가 없어진 시대였으므로 루트비히 2세는 순수히 취미로서 성을 지은 것이다. 이 순수한 취미 때문에 바이에른 경제는 파탄이 났다[1]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는 성이 관광지 따위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자신이 죽으면 성을 부숴버리라고 유언했다. 물론 성은 관광지로 최고였으므로 부서지지 않고 지금도 바이에른의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되어 있으며,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성도 이 성을 본뜬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또한 루트비히 2세와 같은 말을 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성은 부숴지지 않았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역사 -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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