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바이에른주(州) 퓌센을 가다. - 노이슈반슈타인 성, 호엔슈반가우 성

 
이번 여행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독일 바이에른 주 퓌센으로 이동하는 여정이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A8 고속도로와 B472 도로를 이용하면 3시간 거리에 독일 퓌센이 있다.

독일 바이에른 주 퓌센에는 호엔슈반가우 성과 디즈니 성의 실제모델로도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있다.

 

 

독일 퓌센으로 가는길에 비가 조금 내리고 있다.

독일의 작은 마을답게 고즈넉한 풍경이군.

 

 

퓌센으로 향하는 길에 어느 마을로 들어가 길가의 풍경을 담아 봤다.

 

 

 

도로 양옆에 펼쳐지는 중세 유럽의 작은 마을들이 보기 좋다.

 

 

 

이곳은 소나 말들이 자유롭게 뛰어 놀법한 풍경인데 동물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지나가는 차가 많지 않아 시원하게 달리며 이국적인 농촌 마을의 정취에 취해본다.

 

 

멀리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가는 길에 호엔슈반가우 성이 있다.

 

호엔슈반가우 성은 루트비히 2세가 태어나 17세까지 자란 성으로, 바이에른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으며 루트비히 2세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시절을 보낸

호엔슈반가우 성을 잊지 못해 많은 시간을 이 성에서 보냈다고 한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노이슈반슈타인 성 못지않게 아름다운 성이다.

 

 

호엔슈반가우 성 (Hohenschwangau)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가는 길에 호엔슈반가우 성을 카메라에 담아 본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가는 방법은 3가지이다. 마차, 버스 그리고 튼튼한 두 다리.

뚜벅이는 올라가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주위의 풍경과 많은 관광객들과의 동행은 힘든 느낌을 지워버릴 수 있다.

어느정도 걸으니 노이슈반슈타인 성 윗부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성이 워낙 커 전체를 담을 수 없어 일부분만 찰칵..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ß/Schloss Neuschwanstein)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신 백조 석성'(新白鳥石城)의 의미이며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가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이다. 

 

바이에른의 왕 류트비히 2세의 부왕이었던 막시밀리안 2세는  '백조의 성'이라 불리던 폐성 호엔슈방가우 성을 사들여 고딕 양식으로 개조, 재건축하였고,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가 이곳에서 자랐다. 때문에 루트비히 2세는 어렸을 적부터 건축에 대해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또, 그는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바그너는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토대로 한 오페라 작품들을 썼고, 이 때문에 루트비히는 게르만 민족의 신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호엔슈방가우 성은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모두 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걸맞은 새로운 건축물들을 건설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 기획은 1862년 그가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하기 전 뮌헨 왕궁의 통로에 바그너가 쓴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장면을 벽화로 그렸다. 그리고 자신의 궁전을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하고, 치엠 호수에 베르사유 궁전을 본딴 궁전을 짓게 하는 등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 때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바그너를 다시 불러 자신에 구상에 가담시켰다. 그러나 대리석 465톤, 기타 석재가 1,550톤, 벽돌 40만개 시멘트 600톤으로 지은 이 성으로 인해 국고가 낭비되어 재정 상황이 좋지 않게 되어, 국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를 축출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일로 루트비히 2세는 의욕상실에 빠졌고, 퇴위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구상을 떠올리면서 다시 생기를 찾았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 바르트부르크 성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이와 같은 성을 호엔슈방가우 성 맞은 편에 지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지역은 지형이 험해, 그의 계획대로 성을 지을 수가 없었다. 이에 성은 당초 계획과 다른 새로운 형태로 수정 계획되었고, 1868년 건설작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루트비히 2세는 교권 강화를 둘러싸고 관료들과 마찰을 빚게 되면서 정치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광적으로 건축에 몰두했다. 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외에도 다른 여러 곳에 건축물을 짓게 되면서 국고를 낭비하고, 수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의료진으로부터 정신병자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왕위에서 퇴위당했고, 퇴위당한 지 3일 만에 슈타른베르거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사인은 자살로 공식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많은 의문점을 낳고 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1892년 완성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성의 완공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대포의 발명으로 성이 이미 쓸모가 없어진 시대였으므로 루트비히 2세는 순수히 취미로서 성을 지은 것이다. 이 순수한 취미 때문에 바이에른 경제는 파탄이 났다[1]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는 성이 관광지 따위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자신이 죽으면 성을 부숴버리라고 유언했다. 물론 성은 관광지로 최고였으므로 부서지지 않고 지금도 바이에른의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되어 있으며,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성도 이 성을 본뜬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또한 루트비히 2세와 같은 말을 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성은 부숴지지 않았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역사 - 출처 : 위키백과

동유럽 국가 헝가리 여행 - 부다페스트 (수도)

 

대한민국 인천공항에서 11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2시간 30분 떨어져 있는 동유럽 국가인 헝가리 부다페스트 여행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서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로 가는 길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전경

도나우강 주변에 건물을 지어 물의 나라 같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 
-> 1896년 헝가리 건국 천년을 기념해 만든 광장으로 헝가리의 
위대한 왕들과 위인 14명의 동상이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성이슈트반 대성당 

-> 헝가리에 기독교를 전파한 업적으로 기독교의 성인으로 

추대된 이슈트반성와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성당이다.

 

헝가리 (Hungary)

정식 명칭은 헝가리공화국(Republic of Hungary)으로, 1989년 10월 23일 헌법 개정으로 헝가리인민공화국(Hungarian People’s Republic)에서 바뀐 명칭이다. 면적은 9만 3028㎢, 인구는 989만 7541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부다페스트(Budapest)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마쟈르족으로 96.6%이며, 독일인이 1.6%, 기타 슬로바키아인과 남슬라브인, 루마니아인이 있고, 언어는 민족고유의 마쟈르어를 사용한다. 국민의 67.5%가 가톨릭교를 믿으며, 개신교 20%, 그리스정교 2.6%이다.

기후는 다습한 대륙성기후로서 봄·가을이 짧고 여름에 비가 많이 온다. 경제는 농업 위주였으나, 제2차세계대전 후 공업화에 주력하여 공업생산이 주도하게 되었다. 특히 광업·알루미늄공업·자동차·전자기기 등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주요 자원은 석탄·천연가스·보오크사이트 등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1,37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4450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의원내각제 성격의 공화제로서, 대의기구는 임기 4년의 국민회의(386석)가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사회당(HSPR), 청년민주연합(FIDESZ), 민주포럼(HDF) 등이 있다.

약사

마쟈르족은 9세기 말 러시아로부터 이주해 왔으며 1001년 최초로 독립왕국을 창건한 뒤 13세기부터 몽고·터키·오스트리아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간 화해협정이 성립, 헝가리는 내정상 독립을 회복하였지만 오스트리아 황제를 헝가리 왕으로 섬기는 이중군주국(Dual Monarchy)으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형태는 1918년 11월 함부르크 왕조의 해체 시까지 지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동시에 공산지도자 쿤(Kuhn Bela)의 주도하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4개월만에 붕괴되고, 1920년 3월 왕정복귀 후 헝가리는 국토의 71%, 인구의 60%를 인접국에 양도하게 되어 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5년 4월 4일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종전과 함께 소련 주둔군의 지원으로 공산당이 1949년 5월 정권을 장악하고 8월에는 헌법을 제정하여 스탈린식 강압정책을 채택하고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이후 헌법은 1972·1983·1989년 세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스탈린(Stalin, I. V.)이 죽은 뒤 온건한 나지(Nagy, I.) 수상이 등장하여 자유화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1956년 대규모의 반소인민봉기가 발생하자, 소련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였으며, 그 결과 나지는 축출되고 카다르(Kadar, J.)의 새 정부가 들어섰다.

카다르는 1967년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20년간 갱신하는 등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낙후된 경제개발에 주력하여 1968년부터 여러 차례 경제개혁을 실시하였다.

카다르의 신경제제도는 경제정책의 지방분권화, 시장원리에 의한 가격체제, 노동자의 동기 부여, 서구와의 무역확대를 도모함으로써 동구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철저하고 광범위한 자유화정책과 민생중시정책이라 평가되었고, 실제로 경제체제의 진정한 전환을 가져온 유일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 동안 소련의 공산당을 그대로 답습한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1989년 10월 헝가리사회당으로 개칭)은 유일 합법정당으로서 실질적으로 국가와 정부를 통제해 왔으나 1989년의 헌법개정을 통하여 다당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 헌법개정안은 국가원수를 기존의 대통령위원회라는 집단기구 대신 대통령 개인으로 바꾸고 의회에서 간선하도록 하고 있다.

외교정책의 기조는 중도좌경으로 1955년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해체된 바르샤바조약기구(WTO)·공산권경제상호원조회의(CMEA) 등 기존 동맹권으로부터 탈피하여 전통 서유럽에로의 복귀를 국가의 최대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즉 범유럽 집단안보 및 협력체제에 참여하며, 중유럽협력구상(CEI)·중유럽자유무역협정(CEFTA) 등을 통해 주변 국가들과 정치·경제·군사적 유대관계를 긴밀히 하는 것이다.

다만 인접한 루마니아와는 그 나라에 거주하는 마쟈르족(200만 명)의 지위문제를 놓고 불편한 관계에 있다. 또한 헝가리는 1990년 이래 경제정책의 핵심과제인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청산을 통한 시장경제체제로의 정착과 대외무역의 자유화를 정책기조로 각종 경제개혁 및 개방정책을 계속 추진 중이다.

현재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부흥개발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 국제경제협력기구(OECD) 등 경제 관련기구에 가입하여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동유럽 슬로바키아 여행 - 브라티슬라바 (수도) / 타트라산 / 니트라(市)

/ 트르나바(市)

 

대한민국 인천국제공항에서 11시간 떨어진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서 

차를 타고 3시간 거리에 있는 동유럽 국가인 슬로바키아 여행이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독립한 국가이다.

 

오스트리아 빈 국제공항에서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까지의 거리는 약 65 km이며 50분정도 소요된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 있는 브라티슬라바성에서 본 UFO 다리 전경이다.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지지대 위에 둥근 물체가 보인다. UFO 같이 생겨서 UFO 다리라고 명명했나 보다. 

 

브라티슬라바성(城)에서 본 도나우(다뉴브)강 전경이다.

유람선은 아닌 것 같고 커다란 뭔가를 싣고 유유히 다뉴브강을 누비고 있다.

 

 

유람선과 화물선이 정박해 있다.

다뉴브강의 원류는 알프스 북부의 해발 1,000m의 슈바르츠발트 산지에서 시작하며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등

여러 국가를 잇는 동서 유럽 문화 및 물자 이동의 대동맥이다.

 

 

브라티슬라바 시내 트램 - 사람이 많지 않다.

 

 

브라티슬라바 이면도로를 카메라에 담아 본다.

중세 유럽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이 곳은 다소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래서 그런지 관광객들이 많지 않다.

 

 

슬로바키아 국립 역사 박물관이다.

 

 

슬로바키아 국립 역사 박물관 표지다.

 

 

브라티슬라바내 데빈성 일부다.

 

데빈성 (Devin Castle)

 

데빈성 (Devin Castle)

구석기시대에 처음으로 요새화되어 켈트족 정착기, 로마시대, 모라비아(Moravia) 대제국 시대에 걸쳐 중요한 군사적 요새가 되었다. 
특히 모라비아 시대에는 국경, 행정,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프랑크 왕족의 영토확장에 대항하기 위한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다. 1809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불타 일부가 소실되었다. 1965년 이래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최근5년간 서기1세기의 로마타워 유적, 세라믹 파편, 선사시대 이전의 정착지들이 발견되었다. - 두산 백과 출처

 

 

 

데빈성 주위 산책로다.

가족단위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브라티슬라바 시내에 위치한 한국 슈퍼 (서울프라자)다.

한국에서 공수한 각종 음식류/주류/반찬/스낵류 등을 판매하고 있다.

물론 수입한 물품들이므로 한국보다 가격이 비싸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타트라산으로 가는 길 3시간 40분 거리 (320Km)

 

슬로바키아 타트라산 전경 - 해발 2,655m 높이의 산이다.

타트라산은 폴란드 남부와 슬로바키아 북부의 국경 부근까지 동서 방향으로 뻗은 산맥이다.

 

슬로바키아 타트라산에 있는 각국의 이정표다.

대한민국 서울은 수기로 적어 놓은 듯하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니트라 시

 

슬로바키아 니트라市 전경

79,000명이 살고 있으며 슬로바키아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다.

 

 

니트라성에 바라본 시내 전경이다.

 

 

니트라성 진입로 전경

 

 

니트라성 내부에 있는 각종 조각상들이다.

 

 

우연히 들른 니트라에 있는 아이스하키장 내부를 찍어 봤다.

슬로바키아에서 아이스하키는 꽤 인기있는 스포츠란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50분 거리에 있는 트르나바 시

 

슬로바키아 트르나바市 집 전경

대략 65,000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이다.

 

슬로바키아

 

정식 국가 명칭은 슬로바키아공화국(The Slovak Republic)이다. 현지어로는 슬로벤스카 레푸블리카(Slovenskárepublika)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체코와 함께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다가 1990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국호를 바꾼 후 1993년 1월 1일 체코공화국에서 분리 독립하여 슬로바키아공화국이 되었다.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이며 2012년 1월 현재 대통령은 2009년 4월에 재선에 성공한 이반 가슈파로비치(Ivan Gašparovič)이다. 국회는 단원제이며(150석) 2004년 5월 1일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에 가입했다. 주요 국경일은 8월 30일(혁명 기념일), 9월 1일(헌법 제정일), 11월 17일(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기념일)이다.

중부유럽에 있는 내륙국으로 북쪽으로 폴란드, 서쪽으로 체코, 남쪽으로 헝가리, 동쪽으로 우크라이나, 남서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접해 있다. 면적은 4만 9035㎢로 한반도의 1/4 정도이며, 기후는 대륙성 기후로 여름은 고온 건조하고 겨울은 저온 다습하다. 1월 평균기온은 -1℃~-2℃, 이며 6월 평균기온은 16℃~26℃이다. 2008년 기준으로 총인구는 540만 998명이다. 인구 42만 5000명이 거주하는 수도는 브라티슬라바(Bratislava)로 독일어로는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헝가리어로는 포조니(Pozsony)라고 부른다.

민족 구성은 슬로바키아인(85.8%), 헝가리인(9.7%), 로마인[1.7%(집시)], 기타(1%), 체코인(0.8%) 등이다. 종교는 가톨릭(69%), 개신교(9%), 그리스정교(4%), 무교 또는 기타(9%)로 이루어져 있다. 공용어는 슬로바키아어이고 그 외 헝가리어도 쓴다. 소수의 사립학교를 제외하고 슬로바키아의 모든 학교들은 공립이며, 6세부터 시작하여 9년간은 의무교육이다.

2008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은 673억 유로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2만 2600달러이다. 교역은 수출 495억 유로로 전년 대비 5% 증가했으며 수입은 전년 대비 5% 증가한 502억 유로이고 경제성장률은 6.4%, 실업률은 9.6%, 인플레이션율은 4.6%이다. 2009년 1월 1일 유로존(Eurozone)에 가입하여 유로(Euro)화를 쓰고 있다.

한국과는 1990년 3월 22일 체코슬로바키아와 수교한 후에 1993년 1월 1일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 분리에 따라 재수교하였다. 2009년 3월 기준으로 교민은 2000명으로 유럽연합 국가 중 제8위이다. 시차는 한국보다 8시간 늦으며 국제전화 코드는 421이다.

2008년 한국과 교역 총액은 35억 달러로 이 가운데 수출은 34억 달러이고 수입은 8000만 달러이다. 수출 품목은 자동차 부품, 평판디스플레이 및 센서, 영상기기, 컴퓨터, 전선 등이고 수입 품목은 자동차, 원동기 및 펌프, 석유화학제품 등이다. 투자 누계를 살펴보면 한국의 대()슬로바키아 투자는 8억 7464만 달러(수출입은행, 2008년 12월 기준)이고 슬로바키아의 대()한국 투자는 5만 4000달러(지식경제부, 2008년 12월 기준)이다.

북한과는 1948년 10월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1993년 1월에 남한과 동시에 재수교를 하였다. 북한과의 교역 총액은 2007년 기준으로 119만 2000달러로 이 가운데 대()북한 수입이 6만 8000달러, 대()북한 수출이 7000달러를 차지한다. 수입 품목은 기계, 장비 등이고 수출 품목은 기계, 원자재 등이다.

출처 : 외교부 슬로바키아 개황

 

 

동유럽 체코 여행 II - 체스키크롬로프 (Cesky Ckrumlov)

 

대한민국 인천공항에서 11시간 떨어진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서 차를 타고 

3시간 거리에 있는 동유럽 국가인 체코 여행이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독립한 국가임.

 

체코 수도인 프라하에서 남쪽으로 E55 고속도로를 이용해 약 2시간10분 거리에

체스키크롬로프 (Cesky Ckrumlov)라는 동화에 나옴직한 작은 마을을 사진에 담았다.

체스키크롬로프는 1992년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체코 프라하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약 170Km 떨어진 곳에 동화 마을처럼 

조성된 곳이 있다.

 

체스키크롬로프 (Cesky Ckrumlov) map 이다.

 

 

체스키크롬로프 (Cesky Ckrumlov) 위성뷰다.

S자 형태의 블타바 강이 이채롭다.

자연에 의한 것인지 아님 인위적인 공사로 조성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블타바 강 주위로 지어진 건물들이 눈이 띈다

 

 

여름이라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마을 사이에 강물이 흘러 보트나 레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마을내 골목 전경이다.

동화에나 나올법한 건물 및 골목이다. 차 한대가 주차해 있어 인상적이다.

모든 건물에 사람이 거주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건물사이를 시원하게 강물이 흐르고 있다.

 

 

 

마을내 성당

 

마을내 다리다.

 

건물사이로도 물이 흐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마을내 작은 박물관이다.

 

 

 

마을 성인의 동상인데 이름을 모르겠네요 ㅠㅠ

 

마을내 유스호스텔이다.

가격은 저렴하고 나름 며칠 지내기 괜찮은 곳이다.

 

마을내 레스토랑에서 시킨 음식 - 샌드위치에 뭔 소스인데 이름이....

 

체코 체스키크롬로프 (Cesky Ckrumlov)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200여 km 떨어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체스키크룸로프가 있다. S자로 완만하게 흐르는 블타바 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작은 도시로 붉은 지붕과 둥근 탑이 어우러져 동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체코가 공산 국가였던 시절에는 그저 낙후된 도시에 불과했던 체스키크룸로프는 199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300여 개 이상의 건축물이 문화 유적으로 등록되었으니 도시 전체가 유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세기 남 보헤미아의 비테크 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고딕 양식의 성을 짓기 시작한 것이 체스키크룸로프의 시작이다. 이후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건물들이 일부 추가 되었으나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거의 없다. 중세 마을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으로 평가 받고 있다.

13세기 세워진 체스키크룸로프 성은 프라하 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성이다.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하면서 둥근 지붕의 탑과 회랑 등이 추가 되었다. 성 안에는 영주가 살던 궁전과 예배당, 조폐소, 바로크식 극장과 정원이 재현되어 있어 중세 귀족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다. 구시가의 중심지는 중세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스보르노스티 광장으로 주변에 후기 고딕 양식의 성비투스 성당 등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체스키크룸로프는 다른 중세 도시들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이 좁은 길은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과 카페가 가득해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해마다 6월이면 축제가 열리는데, 마을 사람들 절반 이상이 르네상스 시대의 옷을 입고 거리에서 공연을 한다.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는 바로크 시대의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회나 18세기 귀족들의 가면무도회가 열린다.

 

 

 

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유럽 체코 여행 I - 수도 프라하

 

대한민국 인천공항에서 11시간 떨어진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서 

차를 타고 3시간 거리에 있는 동유럽 국가인 체코 여행이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독립한 국가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체코 프라하로 가는 길이다.

체코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이 맞닿아 있으며 비엔나에서 체코 프라하까지의 거리는 

대략 340Km이며 승용차로는 3시간 30분 남짓 걸리며 대중 교통을 이용할 경우는 

5시간 정도 걸린다.

 

체코 수도 프라하 전경이다.

구시가지 풍경으로 건물 지붕색상이 모두 갈색풍으로 통일되게 지어놨다.

알록달록한 것보다는 일관된 색상이 보기 좋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건물 증/신축에 대해 정부의 통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체코 프라하성이다.

체코를 대표하는 성으로 9세기 말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카를 4세 때인 

14세기에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다

 

체코 프라하성 입구다.

프라하 또한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 필자가 방문했을 때도 

세계 각지의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체코 프라하 트램이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운행중인 트램보다 세련됐다.

 

체코 프라하 카를교에서 본 전경이다.

 

프라하 (Prague)

영어·프랑스어로는 프라그(Prague), 독일어로는 프라크(Prag)라고 한다. 체코 중서부, 블타바강(:몰다우강) 연변, 라베강(:엘베강)과의 합류점 가까운 곳에 있다. 체코 최대의 경제·정치·문화의 중심도시이다. 시내를 흐르는 블타바강은 너비가 100~300m이며 몇 개의 강이 있다.

비교적 따뜻하며 습도가 낮고 연 강수량은 508mm이다. 프라하분지에는 BC 4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슬라브인()이 들어온 것은 5·6세기로 9세기 말에 성이 축조되었다.

11세기에는 구()시내 광장에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12세기에는 이미 중부유럽 최대의 도시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14세기에 이르자 카렐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시는 더욱 발전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당시의 인구는 4만으로 추정된다. 14~15세기에는 후스전쟁의 싸움터가 되었다.

15~16세기에는 고딕 건축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정치적인 의미는 상실하였다. 17세기에는 바로크 건축이 번성하였고 18세기 말부터 다시 수공업 등이 일어나 경제적으로 회복되어 인구도 8만을 헤아렸다. 그 후에도 인구는 늘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하였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이래 수도가 되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8년의 이른바 2월 사건, 1968년 1월의 ‘프라하의 봄’으로 부르는 자유화운동이 소련 등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입으로 짓밟힌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1993년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어 체코의 수도가 되었다.

공업도시로서의 프라하에는 100여 개의 기업이 있고 전국 공업생산의 10% 가량을 생산한다. 주요한 것은 기계공업으로, 국영기업의 CKD(전기기관차 등)와 테슬라(모터·방송관계) 등이며 인쇄공업도 중요하다. 식품공업으로는 스미호프의 맥주, 프라하 햄이 유명하고, 그 밖에 의복·제지·화학(주로 타이어) 공업 등이 영위되고 있다. 유럽철도의 대중심지로, 유럽의 각국과 연결되며 하항()이다. 근년에는 항공망의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시는 10개의 구()로 나누어져 있으며 교외지역으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 시에는 대통령관저·정부·의회 등의 정부기관 및 국제적인 기관 등을 비롯해서 과학아카데미·프라하대학교(1348)·음악대학·도서관·스트라호프 민족자료관(옛 수도원)·박물관·극장·천문대·스포츠시설 등이 집중해 있다.

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모차르트의 나라 오스트리아 여행 - 잘츠부르크 / 헬브룬 궁전 / 운터스베르그 산

 

대한민국 인천공항에서 11시간 떨어진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서 

A1 고속도로를 달려 3시간 정도 가면 모차르트의 생가가 있는 잘츠부르크 여행이다.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에서 잘츠부르크로 가는 길이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잘자흐강이다.

물색깔이 탁하다. 각 가정의 폐수 유입이 원인인지는 모르겠으나 맑지가 않아 

보기가 좀 그렇다. 다행히 악취는 나지 않아 강변을 다니기가 괴롭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잘자흐강 유람선 내부다.

여행객의 도시답게 많은 사람들이 승선했으며 강 상류에서 하류로 

이동하다 몇번의 유람선 운행 묘기(?)도 보여준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시내 풍경이다.

많은 관광객으로 발디딜 틈이 없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생가에서 본 야외 풍경이다.

시장인지 모르겠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트램 내부다.

관광객에게 잘츠부르크내 트램 이용은 무료이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지역 맥주다.

Stiegl 잘츠부르크 지역 맥주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헬브룬 (Schloss Hellbrunn) 궁전 가는 길 

-> B150 도로를 이용하면 대략 17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헬브룬궁전이다.

17세기 대주교 마르쿠스 지티쿠스가 1616년에 세운 

여름 별궁으로 물의 낙원이라 불리우며 작고 아담한 분수가 많아 볼만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헬브룬궁전내 분수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헬브룬궁전내 가이드가 

헬브룬궁전에 대한 설명을 열심히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헬브룬궁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독일과 공유하고 있는 

운터스베르그 (Untersberg) 산으로 가는 길이다.

A1 도로를 약 40분 달리면 운터스베르그산이 나온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운터스베르그산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운터스베르그산에서 바라본 풍경 - 멋지다!!

운터스베르그산은 해발 1,973m로 독일 베르히테스가덴시와 걸쳐 솟아 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운터스베르그산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고 있는 모습

 

 

잘츠부르크 [Salzburg]

서부 독일의 국경 근처, 잘차흐강()의 양안()에 있는 공업도시이다. 로마시대에 생긴 도시이며, 8세기에 주교청이 설치된 후 교회령이 되어 가톨릭 주교가 통치하였고, 가톨릭문화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폭격으로 파괴되었지만 교회와 궁전 등 바로크 건축의 작품이 많이 보존되어 있어 ‘북쪽의 로마’라고 부른다. 지명은 ‘소금의 산’이라는 뜻인데, 이름 그대로 예로부터 소금 산지로서 유명하며, 지금도 이곳의 소금이 전국에 공급되고 있다. 전쟁 후에는 남서부의 카프른에 유럽 최대급의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W.A.모차르트의 출생지이며, 그를 기념하여 1920년부터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해마다 여름철에 개최된다. 악기·인쇄출판·석재·시멘트·양조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 그로스글로크너산의 동쪽 기슭에는 라듐 온천지로서 유명한 관광휴양지 바드가슈타인이 있으며, 스키와 스케이트도 성행하여 사시사철 찾는 사람이 많다. 
  
해마다 셀 수 없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이 곳은 모차르트의 생가 외에도 바로크 건축 양식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잘츠부르크 대성당과 잘츠부르크 성,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미라벨 정원(Mirabell Garden) 등 볼 거리가 많다. 도시의 동쪽에는 잘츠캄머구트(Salzkammergut)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호수 지대가 있다. 
  
관광과 문화, 대학, 겨울 스포츠의 도시이며 또한 박람회의 도시이기도 하다. BMW와 포드(Ford), 포르쉐(Porsche)등 자동차 회사들이 이 곳에 지사와 공장을 가지고 있고, 많은 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인터넷 두산백과 출처]

 

 

모차르트의 나라 오스트리아 여행 - 할슈타트 (Hallstatt)

 

할슈타트는 잘츠카머구트 지방, 잘츠부르크와 그라츠 국도에 위치한 소금광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할슈타트 호수를 둔 산 기슭은 작고 아담한 집을 지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또한 중국의 광산회사가 광동성 혜주시에 이곳 할슈타트와 

같은 규모의 마을을 조성해 논란이 있었으나 

일종의 나비효과로 인해 그전보다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인천공항에서 11시간 떨어진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서 할슈타트에 

가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로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서 A1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3시간 20분 거리에 할슈타트가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잘츠부르크에서 A1 고속도로 -> B158 도로를 이용하면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필자는 실제 잘츠부르크에서 할슈타트로 이동했다.

 

 

할슈타트호를 바라보는 작고 아담한 집들을 지어놨다. (아마 사람은 거주하고 있지 않은 듯...)

단순한 집인데 이것이 어디에 지어졌는냐에 따라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느끼는 감정이

다른 듯 하다.가만히 보고 있으면 동화속의 작은 집들이 연상된다.

 

 

 

오른쪽에 알프스 산자락이 병품처럼 놓여 있다.

 

듬성듬성 쌓여 있는 눈이 있고 병풍 같이 누워 있는 산이 작은 마을을 이루는 할슈타트를 지켜주는 듯 하다.

 

 

하룻밤 묵은 민박집..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관광 명소 답게 작은 민박집 또한 많다.)

 

 

 

민박집 근처 공원 전경이다.

넓은 공원에 많은 놀이기구는 없었지만 가족끼리 들러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였다.

 

할슈타트 [Hallstatt]

오스트리아 오버외스터라이히(Oberösterreich)주(州) 남쪽 그문덴 디스트릭트에 있는 관광도시.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 지역에 있는 도시로, 할슈테터호(Hallstätter Lake) 가까이 위치해 있다. 도시명의 ‘hal’은 고대 켈트어로 소금(salt)이라는 뜻인데, 예로부터 소중한 자원인 소금을 통해 역사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렸다. BC10~5세기에 할슈타트문화가 발달했고 할슈타트 분묘군 유적이 남아 있다. 도심 위쪽에는 B.C 2000년경 형성된 세계 최초의 소금광산이 있다. 1311년부터는 도시에 장이 서기 시작했고, 1595면 소금산업의 중심지가 40km 떨어진 에벤호(Eben L.)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현재는 관광업이 도시 경제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할슈테터호는 호수 기슭 경사면을 깎아서 집을 지은 오래된 마을로 유명하다. 근처에는 케이블카를 이용해 올라갈 수 있는 ‘희고 높은 산’이라는 뜻의 다흐슈타인산(3,800m)이 있다. ‘할슈타트-다흐슈타인 잘츠카머구트 문화경관(Hallstatt-Dachstein Salzkammergut Cultural Landscape)’은 1997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인터넷 두산백과 출처]

모차르트의 나라 오스트리아 여행 - 비엔나 / 슈테판 대성당 / 쇤부른 궁전

 

대한민국 인천공항에서 11시간 떨어진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서 A4 도로를 

20분 정도 달리면 비엔나 시내에 다다른다.

진정한 유럽 여행은 열차와 버스등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것이 대중적이지만

필자는 각 대중교통의 연결 시간 및 대기 시간이 아까워 차를 렌트하여 여행을 하고자 한다.

 

 

비엔나 공항에서 비엔나 시내로 가는 길이다.

A4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되겠다.

 

 

슈테판 대성당(Stephansplatz)이 있는 위치를 나타낸다.

 

오스트리아 모든 도시는 중세풍의 건물을 잘 보존하고 있다.

차를 타고 타니면서 창밖을 보노라면 유사한 건물들이 많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시내에 있는 슈테판 대성당 입구 - 많은 사람이 성당 외부에 있었음

 

슈테판 대성당은 1147년에 세워진 로마네스크 및 고딕 양식의 건물로써 

루돌프 4세가 주도하여 축조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비엔나 대교구의 대성당이다.

8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건물이나 외부 모습은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슈테판 대성당 내부 전경이다.

필자가 믿는 종교는 카톨릭은 아니나 성당 내부 분위기는 엄숙하며 조용하여 왠지 모를 경외감이 느껴졌다.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기도하고 있어 필자도 여행중 무탈을 위해 손을 모으고 기도해 봤다.

 

 

슈테판 대성당에서 남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쇤부른 궁전(Schönbrunn Palace)이

다.

대략 20분정도면 쇤부른 궁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쇤부룬 궁전 입구다.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으로 

600년의 역사가 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많은 왕들이 업무를 보았고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을 때는 나폴레옹군의 사령부로도 사용된 곳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쇤부룬 궁전 주위 전경을 담아 봤다.

쇤부룬 궁전 근처에 차를 세우고 조용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본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쇤부룬 궁전 건물이다.

건물내 1,441개의 방이 있다고 하니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쇤부룬 궁전 내부 모습이다.

과거 한 시절을 풍미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생활상들이 고스란히 잘 보관되어 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쇤부룬 궁전의 또다른 내부 모습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쇤부룬 궁전내 작은 호수(?)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궁전 뒤쪽으로 올라가서 오스트리아 비엔나 시내의 일부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슈테판 대성당에서 2.7Km 떨어진 곳에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이 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입구 - 미술사 박물관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트 요제프 

1세 황제 (1830~1916)에 의해 세워졌으며 1891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며

전시품은 대개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품과 유럽 각국의 유명 그림 및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사 박물관 입구에서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처음 보이는 동상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시내 트램이 지나간다.

 

 

 

 

트램이 어떤지 한번 타봤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트램 내부 - 조금 낡은 듯한 느낌이지만 나름 여기저기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있어 정감이 간다.

 

오스트리아 (Austria)

정의

유럽 중부에 있는 공화국.

개관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public of Austria)으로, 국명인 오스트리아는 10세기 중엽 동방의 이민족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오스트마르크(Ostmark:동쪽의 변경)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지역은 중세시대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였다.

면적은 8만 3871㎢, 인구는 871만 1770명(2016년 현재), 수도는 빈(Wien)이다.

주민의 91.1%가 오스트리아인이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인 등이 3%이다. 공용어는 독일어이며, 종교는 73.6%가 가톨릭교, 4.7%가 개신교를 믿는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경제부흥이 늦어졌으나 1949년부터 시작된 마샬플랜을 바탕으로 1951년 이후 연평균 6%의 경제성장을 하여 선진국으로 진입하였다. 문화와 교육면에서는 독일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등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되어 있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3,79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7230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연방공화제의 의원내각제로, 임기 6년의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5∼6년의 상원(62석)과 임기 4년의 하원(183석)으로 구성된다. 주요 정당은 국민당, 사민당, 자유당, 녹색당 등이다.

약사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와해되면서 오스트리아제국이 성립되었으며, 1918년 제정()의 폐지로 공화국이 되었다. 1919년 빈조약으로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가 이 나라에서 독립되면서 현재의 국경선이 결정되어 게르만민족만의 국가가 되었다. 1920년 헌법을 제정하였고, 1955년 10월 개정한 바 있다.

1939년 독일과 통합되었으나, 제2차세계대전 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고, 1955년 영세중립선언으로 독립하였다.

현 피셔(Heinz Fischer) 대통령이 2004년 7월 취임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있고, 그 아래 실권자 파이만(WernerFaymann) 총리가 2008년 12월 취임하여 내각을 이끌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좌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55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크로아티아 여행 - 플리트비체 공원 (Croatia - Plitvice Lakes National Park)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Plitvice Lakes National Park)은 1949년 크로아티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에는 유네스코(UNESCO,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국립공원의 규모는 3만 ha이며, 빼어난 자연 환경 및 수천 년간 물이 흐르며 쌓인 석회와 백악의 자연 댐이 장관을 이루며 층층 계단을 이루고 있는 16개의 호수가 크고 작은 90여 개의 폭포들로 연결되어 있다. 호수는 탄산칼슘을 다량 함유하고 석회 침전물을 생성하여 빛의 굴절에 따라 녹색, 푸른색, 청록색, 회색 등의 다양한 색상을 연출한다.

=> 크로아티아 개황, 2010. 9., 외교부 출처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대략 2시간이내에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도달한다.

 

 

먼저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도착하면 입구에 각 코스를 설명하는 입간판이 있다.

모든 코스를 하루이틀내 트래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래 각 코스별 소요시간이 표시되어 있듯이 코스별 적게는 3시간, 많게는 8시간 이상 걸리므로 

여행 시간, 비용등을 고려해 코스를 선택하면 되겠다.

 

입구1에서 출발하는 A,B,C,K 코스가 있으며

A 코스는 2~3시간 소요되며 걸어서 공원 아랫부분을 볼 수 있음

B 코스는 3~4시간 소요되며 코즈약 호수 (lake Kozjak)를 배로 건너는 프로그램이 포함됨

C 코스는 4~6시간 소요되며 버스로 공원 윗쪽부분까지 이동하여 배로 코즈약 호수를 건너는 

   프로그램임

K 코스는 가장 오래 걸리는 6~8시간 정도 소요되며 셔틀버스나 호수내 배를 이용하지 않고 공원 

   전체를 걸어서 자연을 즐기는 코스다.

 

입구2에서 출발하는 E,H,F,K 코스가 있으며

E 코스는 2~3시간 소요되며 걸어서 공원 윗쪽부분을 볼 수 있음

F 코스는 3~4시간 소요되며 코즈약 호수 (lake Kozjak)를 배로 건너는 프로그램이 포함됨

  => 입구1에서 출발하는 B 코스와 같으나 출발하는 곳이 다름

H 코스는 4~6시간 소요되며 버스로 공원 윗쪽부분까지 이동하여 배로 코즈약 호수를 건너는 

   프로그램임

  => 입구2에서 출발하는 C 코스와 같으나 출발하는 곳이 다름

K 코스는 가장 오래 걸리는 6~8시간 정도 소요되며 셔틀버스나 호수내 배를 이용하지 않고 공원 

   전체를 걸어서 자연을 즐기는 코스다.

 

 

공원내 코즈약 호수위 선상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배를 타기위해 기다리고 있다. 

고즈넉한 호수를 보고 있으니 들뜬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다.

 

 

공원내 작은 폭포의 모습이다.

 

 

땅속에서 쉴새없이 내리는 폭포를 보며 자연의 경이로움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공원내 크고 작은 폭포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곳곳에 나무 다리를 연결하여 방문객으로 

하여금 친숙한 관광이 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 (Plitvice Lakes National Park)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Plitvice Lakes National Park)에는 아름다운 호수들, 동굴 그리고 폭포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자연경관은 카르스트(karst) 지형에서 보이는 풍광의 전형이며, 석회암과 백악 위로 흐르는 물은 수천 년 이상에 걸쳐 침전물을 쌓아 천연의 댐들을 만들었으며, 그들은 그들대로 또 일련의 아름다운 호수, 동굴, 폭포 등을 만들었다. 이들 지질학적 과정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플리트비체 호수들의 유역은 생물 기원의 지형 형성물이자 석회암과 백운석으로 이루어진 카르스트 지형의 강 유역으로 약 20개의 호수가 있고, 이끼, 조류, 수생 박테리아 등을 매개로 하여 탄산칼슘이 물속에 침전됨으로써 만들어졌다. 이들은 기이하고 별난 형태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침전물이 지붕을 이루거나 둥근 천장이 있는 동굴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탄산염 광물의 연대는 후기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그리고 백악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두께가 최고 4,000m에 달한다. 이 지역에 자연스레 형성된 천연 호수의 특징을 유지하고 보존하려면 기존의 경계 범위를 확장하여 전체 지면과 지하 배수로 대부분을 포함해야 한다. 그 새로운 지역들은 쥐라기 시대의 백운석이 곁들여진, 카르스트 지형의 석회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6개의 호수가 믈라카펠라(Mala Kapela) 산과 플례세비카(Pljesevica) 산 사이에 서로 잇닿아 있다. 이곳의 호수들은 상류 및 하류 호수로 나눌 수 있다. 백운암 계곡에 형성된 상류 호수들은 여러 개의 폭포들로 연결되어 있으며 두터운 삼림 지대가 둘러싸고 있다. 상류 호수에 비해 비교적 얕고 규모가 작은 하류 호수들은 기반이 석회암 지역이며 덤불숲이 성글게 둘러싸고 있다.

백운암으로 된 장벽이 상류 호수들을 서로 가르고 있는데, 탄산염 침전물이 계속 쌓여서 이 같은 장벽을 생성하였다. 이끼나 조류 외피에 덮여 가면서 탄산칼슘과 함께 쌓이는 트래버틴 침전물은 물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지점에 주로 축적된다. 하류 호수들은 상류 호수의 물이 빠져나가는 지하 구멍 위에 아치형으로 깎이고 부서져서 형성된다.

고도가 낮은 곳에서는 너도밤나무 단일 수종의 숲, 그보다 높은 곳에서는 너도밤나무와 전나무의 혼합림으로 이루어지는 그 삼림은 또 백운석과 석회암으로 구별된 땅속의 지층들에 의해 분류할 수도 있다. 백운암 지역은 신생대 제3기의 소나무, 서어나무(hornbeam), 가문비나무(spruce), 전나무와 너도밤나무의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회암 지역에 분포하는 삼림은 유형이 많지 않지만, 비교적 넓은 지역에 가문비나무, 양치식물, 단풍나무, 헤더(heather)가 자라고 있다.

그리고 너도밤나무와 가문비나무가, 옻나무(sumac)와 윗부분을 자른 서어나무(coppiced hornbeam)가 섞여 있다. 검은오리나무(black alder, Alnus glutinosa), 그레이아이비(grey ivy), 버드나무(willow), 갈대(reed), 부들(bulrush) 등이 자라는 수생식물 지역도 발견된다. 고도(), 지질, 토양, 그 밖의 다양한 생태계의 요인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의 목초지가 모자이크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이곳은 유라시아큰곰(European brown bear, Ursus arctos arctos), 늑대, 수리부엉이(eagle owl), 큰뇌조(capercaillie)를 비롯한 동물상도 비교적 풍부하다. 기록에 따르면 126종의 전체 조류 중에 70여 종이 이곳을 번식지로 삼는다고 한다.

이 지역은 기원전 1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선사 시대 때 일리리아 지방에 살았던 야푸드족(Japud)의 요람이었다. 야푸드족의 문화는 로마인들에 의해 이어졌으며, 기원후 8세기부터는 슬라브족이 그곳을 차지했다. 고고학적 유적으로는 현재의 플리트비체 마을이 있는 자리의 선사 시대 정착지, 요새, 청동기 시대의 연장과 도기 등이 있다. 플리트비체 호수는 1949년 4월 8일 법률에 의해 공공 유적지로 지정되었고, 1949년 관보(OfficialJournal, Narodne novine) No. 29호에 국립공원으로 선포되었다. 1979년에는 세계유산지역으로 등재되었다.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중남부 유럽 국가 크로아티아를 가다 I - 자그레브 (크로아티아 수도)

 

대한민국 인천공항에서 11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4시간 떨어져 있는 중남부 유럽 국가인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여행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가는 길이다.

대략 400km 정도의 거리로 서울 -> 부산간 거리만큼 되겠다.

물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대략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엘라치치 광장이다.

19세기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한 엘라치치 총독의 기마상이 광장 중간에 세워져 있다.

엘라치치 광장은 크로아티아 여행의 시작이 되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종교 행사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대성당이다.
유럽여행을 다니며 느낀 것이지만 성당 건물하나는 참 멋지게 지어놨다.
1093년 헝가리 왕인 라디슬라스가 건설을 시작하여 
1102년에 완공했고 1217년에 성모마리아에게 헌정됨

내가 갔을 땐 오른쪽 탑이 수리 중이었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시내 전경이다.

건물 형상이 비슷하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트램이다.

 

크로아티아

정의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에 있는 공화국.

개관

정식 명칭은 크로아티아공화국(Republic of Croatia)으로, 아드리아해안에 위치하며, 해안선의 길이는 5835㎞이다.

면적은 5만 6594㎢, 인구는 446만 4844명(2015년 현재), 수도는 자그레브(Zagreb)이다.

주민은 크로아티아인 75%, 세르비아인 12% 등이다. 언어는 세르보크로아트어가 공용어이며, 종교는 가톨릭교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나 동북부는 대륙성 기후이며, 주요 산업은 금속·조선·직물·식품·관광 분야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57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1696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대통령 중심제 요소가 가미된 공화제의 의원내각제이며,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152석)이다. 주요 정당은 민주연합, 사회민주당, 사회진보당, 농민당 등이다.

약사

1918년 세르비아·슬로베니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왕국을 구성하였으나, 1990년 4월 자유총선을 통하여 비공산민주정부가 수립되었고, 1991년 5월 유고연방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결과 주민의 91%가 연방탈퇴 및 독립을 지지함으로써 6월 25일 슬로베니아공화국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독립에 반대하고 세르비아공화국으로의 편입을 요구함으로써 양 민족간에 무력충돌이 발생, 이의 수습을 명분으로 세르비아를 지원하는 유고연방군이 개입하여 크로아티아 방위군과 교전을 벌이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1990년 12월 헌법이 발효되었고, 1991년 공화국 내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 정부군간의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연방군이 내전에 개입하여 내전이 확산되었다. 더욱이 연방군이 같은 해 9월 크로아티아 영내로 진격하여 대통령궁을 공습하는 등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유럽연합(EU)의 중재로 휴전과 교전이 반복되다가 1992년 들어 유엔평화유지군이 배치되면서 간헐적으로 전투가 계속되었다. 1992년 독립 이후 처음으로 총선을 실시하여 투지만(Tudjman, F.) 대통령이 이끄는 크로아티아민주연합(CDU)이 압승하였다.

1993년에 들어서서 세르비아계와 정부군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1월 유고연방측과 관계 정상화협정에 조인하였으나 문제점은 남아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우익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92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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