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국가 헝가리 여행 - 부다페스트 (수도)

 

대한민국 인천공항에서 11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2시간 30분 떨어져 있는 동유럽 국가인 헝가리 부다페스트 여행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서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로 가는 길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전경

도나우강 주변에 건물을 지어 물의 나라 같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 
-> 1896년 헝가리 건국 천년을 기념해 만든 광장으로 헝가리의 
위대한 왕들과 위인 14명의 동상이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성이슈트반 대성당 

-> 헝가리에 기독교를 전파한 업적으로 기독교의 성인으로 

추대된 이슈트반성와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성당이다.

 

헝가리 (Hungary)

정식 명칭은 헝가리공화국(Republic of Hungary)으로, 1989년 10월 23일 헌법 개정으로 헝가리인민공화국(Hungarian People’s Republic)에서 바뀐 명칭이다. 면적은 9만 3028㎢, 인구는 989만 7541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부다페스트(Budapest)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마쟈르족으로 96.6%이며, 독일인이 1.6%, 기타 슬로바키아인과 남슬라브인, 루마니아인이 있고, 언어는 민족고유의 마쟈르어를 사용한다. 국민의 67.5%가 가톨릭교를 믿으며, 개신교 20%, 그리스정교 2.6%이다.

기후는 다습한 대륙성기후로서 봄·가을이 짧고 여름에 비가 많이 온다. 경제는 농업 위주였으나, 제2차세계대전 후 공업화에 주력하여 공업생산이 주도하게 되었다. 특히 광업·알루미늄공업·자동차·전자기기 등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주요 자원은 석탄·천연가스·보오크사이트 등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1,37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4450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의원내각제 성격의 공화제로서, 대의기구는 임기 4년의 국민회의(386석)가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사회당(HSPR), 청년민주연합(FIDESZ), 민주포럼(HDF) 등이 있다.

약사

마쟈르족은 9세기 말 러시아로부터 이주해 왔으며 1001년 최초로 독립왕국을 창건한 뒤 13세기부터 몽고·터키·오스트리아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간 화해협정이 성립, 헝가리는 내정상 독립을 회복하였지만 오스트리아 황제를 헝가리 왕으로 섬기는 이중군주국(Dual Monarchy)으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형태는 1918년 11월 함부르크 왕조의 해체 시까지 지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동시에 공산지도자 쿤(Kuhn Bela)의 주도하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4개월만에 붕괴되고, 1920년 3월 왕정복귀 후 헝가리는 국토의 71%, 인구의 60%를 인접국에 양도하게 되어 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5년 4월 4일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종전과 함께 소련 주둔군의 지원으로 공산당이 1949년 5월 정권을 장악하고 8월에는 헌법을 제정하여 스탈린식 강압정책을 채택하고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이후 헌법은 1972·1983·1989년 세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스탈린(Stalin, I. V.)이 죽은 뒤 온건한 나지(Nagy, I.) 수상이 등장하여 자유화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1956년 대규모의 반소인민봉기가 발생하자, 소련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였으며, 그 결과 나지는 축출되고 카다르(Kadar, J.)의 새 정부가 들어섰다.

카다르는 1967년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20년간 갱신하는 등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낙후된 경제개발에 주력하여 1968년부터 여러 차례 경제개혁을 실시하였다.

카다르의 신경제제도는 경제정책의 지방분권화, 시장원리에 의한 가격체제, 노동자의 동기 부여, 서구와의 무역확대를 도모함으로써 동구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철저하고 광범위한 자유화정책과 민생중시정책이라 평가되었고, 실제로 경제체제의 진정한 전환을 가져온 유일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 동안 소련의 공산당을 그대로 답습한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1989년 10월 헝가리사회당으로 개칭)은 유일 합법정당으로서 실질적으로 국가와 정부를 통제해 왔으나 1989년의 헌법개정을 통하여 다당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 헌법개정안은 국가원수를 기존의 대통령위원회라는 집단기구 대신 대통령 개인으로 바꾸고 의회에서 간선하도록 하고 있다.

외교정책의 기조는 중도좌경으로 1955년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해체된 바르샤바조약기구(WTO)·공산권경제상호원조회의(CMEA) 등 기존 동맹권으로부터 탈피하여 전통 서유럽에로의 복귀를 국가의 최대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즉 범유럽 집단안보 및 협력체제에 참여하며, 중유럽협력구상(CEI)·중유럽자유무역협정(CEFTA) 등을 통해 주변 국가들과 정치·경제·군사적 유대관계를 긴밀히 하는 것이다.

다만 인접한 루마니아와는 그 나라에 거주하는 마쟈르족(200만 명)의 지위문제를 놓고 불편한 관계에 있다. 또한 헝가리는 1990년 이래 경제정책의 핵심과제인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청산을 통한 시장경제체제로의 정착과 대외무역의 자유화를 정책기조로 각종 경제개혁 및 개방정책을 계속 추진 중이다.

현재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부흥개발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 국제경제협력기구(OECD) 등 경제 관련기구에 가입하여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중남부 유럽 국가 크로아티아를 가다 I - 자그레브 (크로아티아 수도)

 

대한민국 인천공항에서 11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4시간 떨어져 있는 중남부 유럽 국가인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여행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가는 길이다.

대략 400km 정도의 거리로 서울 -> 부산간 거리만큼 되겠다.

물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대략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엘라치치 광장이다.

19세기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한 엘라치치 총독의 기마상이 광장 중간에 세워져 있다.

엘라치치 광장은 크로아티아 여행의 시작이 되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종교 행사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대성당이다.
유럽여행을 다니며 느낀 것이지만 성당 건물하나는 참 멋지게 지어놨다.
1093년 헝가리 왕인 라디슬라스가 건설을 시작하여 
1102년에 완공했고 1217년에 성모마리아에게 헌정됨

내가 갔을 땐 오른쪽 탑이 수리 중이었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시내 전경이다.

건물 형상이 비슷하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트램이다.

 

크로아티아

정의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에 있는 공화국.

개관

정식 명칭은 크로아티아공화국(Republic of Croatia)으로, 아드리아해안에 위치하며, 해안선의 길이는 5835㎞이다.

면적은 5만 6594㎢, 인구는 446만 4844명(2015년 현재), 수도는 자그레브(Zagreb)이다.

주민은 크로아티아인 75%, 세르비아인 12% 등이다. 언어는 세르보크로아트어가 공용어이며, 종교는 가톨릭교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나 동북부는 대륙성 기후이며, 주요 산업은 금속·조선·직물·식품·관광 분야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57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1696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대통령 중심제 요소가 가미된 공화제의 의원내각제이며,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152석)이다. 주요 정당은 민주연합, 사회민주당, 사회진보당, 농민당 등이다.

약사

1918년 세르비아·슬로베니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왕국을 구성하였으나, 1990년 4월 자유총선을 통하여 비공산민주정부가 수립되었고, 1991년 5월 유고연방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결과 주민의 91%가 연방탈퇴 및 독립을 지지함으로써 6월 25일 슬로베니아공화국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독립에 반대하고 세르비아공화국으로의 편입을 요구함으로써 양 민족간에 무력충돌이 발생, 이의 수습을 명분으로 세르비아를 지원하는 유고연방군이 개입하여 크로아티아 방위군과 교전을 벌이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1990년 12월 헌법이 발효되었고, 1991년 공화국 내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 정부군간의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연방군이 내전에 개입하여 내전이 확산되었다. 더욱이 연방군이 같은 해 9월 크로아티아 영내로 진격하여 대통령궁을 공습하는 등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유럽연합(EU)의 중재로 휴전과 교전이 반복되다가 1992년 들어 유엔평화유지군이 배치되면서 간헐적으로 전투가 계속되었다. 1992년 독립 이후 처음으로 총선을 실시하여 투지만(Tudjman, F.) 대통령이 이끄는 크로아티아민주연합(CDU)이 압승하였다.

1993년에 들어서서 세르비아계와 정부군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1월 유고연방측과 관계 정상화협정에 조인하였으나 문제점은 남아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우익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92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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