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둔계곡은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에 위치한 계곡으로 넓은 폭으로 흐르는 계곡 물이 물놀이하기 좋은 계곡이다. 마치 넓은 풀장과 같은 장소들이 여럿 있으며 그 깊이 역시 장소마다 다양해 어린아이, 어른들 모두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양옆으로 높게 자란 울창한 나무숲이 그늘을 만들어줘 여름이면 진정한 피서를 즐길 수 있고, 가을에는 울긋불긋 새로운 옷을 입는 계곡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엄둔계곡 관광가이드 :
엄둔계곡의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면 뼛속까지 시려오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물속의 작은 돌까지 선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 물이 있는 엄둔계곡은 도시의 삶에 찌든 감정과 더위를 한꺼번에 지워줄 최고의 휴식공간이다. 영월을 여행한다면 봄에는 들과 산에 꽃들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 물이 더위를 식혀주며, 가을에는 살포시 내려앉은 붉은 단풍과 함께 계곡의 물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엄둔계곡을 찾아 자연과 하나 됨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평택시의 자연환경을 보면 약간의 구릉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이다. 동북부에 무봉산, 서북부와 서부에 덕지산, 무성산, 오봉산 등이, 남부에 고등산, 마안산, 중앙에 바람산이 있다. 하천으로는 북서부에 화성시와 경계를 이루면서 남양호로 흘러 들어가는 발안천이, 남동부에는 충남 아산시 둔포면과의 경계를 따라 흐른다.
안성천과 진위천 유역 일대에는 퇴적작용으로 생긴 비옥한 충적평야와 간척평야로 이뤄진 평택평야가 펼쳐져 있다. 진위천시민유원지는 진위면 봉남리에서 국도 1호선 진위교까지 약 2km구간에 걸친 직할 하천변에 형성된 유원지이다.
상류쪽은 상수원 보호구역이다. 이곳은 물이 맑아 여름철에는 1일 약1,000여명의 주민들이 이용하는 자연발생 유원지이다. 이에 평택시에서는 이 지역 일대 휴양시설의 부족해소 및 놀이공간을 제공하고자 하천 및 주변을 정리하고 편의시설을 설치, 시민들이 애용하는 유원지로 개발 정착시켰다.
구글 애드센스의 목적은 내가 연재하는 시사 및 정보성의 글을 네티즌들로 하여금 읽게 하여 거기에 등록한 광고주의 광고를 접한 후 네티즌들이 광고와 관련된 제품을 이용 및 구매하여 광고주가 제품 판매로 인한 매출을 올려 수익창출을 도모하기 위함임으로 내블로그나 홈페이지에서많은 사람들이 내가 올린 정보를 보고 오랜 시간 머물면서 좋은 트래픽을 많이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색보다 유입' 부분을 우선으로 둬야 한다.
유입되어서 들어온 트래픽은 검색 트래픽보다 머무는 시간이 더 길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검색 트래픽을 완전 배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검색사이트 및 SNS 유입으로 블로그가 많이 알려지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겠다.
구글 웹마스터 도구 (Google Webmaster Tools)는 2015년 5월 20일부터구글 서치 콘솔 (Google Search Console)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웹마스터를 위한 구글의 무료 웹서비스다.
색인 상태를 확인하고 웹 사이트의 가시성을 최적화 할 수 있다.
또한 구글에 등록한 블로그나 모바일 앱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와 도구를 이용하고 진단을 받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A8 고속도로와 B472 도로를 이용하면 3시간 거리에 독일 퓌센이 있다.
독일 바이에른 주 퓌센에는 호엔슈반가우 성과 디즈니 성의 실제모델로도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있다.
독일 퓌센으로 가는길에 비가 조금 내리고 있다.
독일의 작은 마을답게 고즈넉한 풍경이군.
퓌센으로 향하는 길에 어느 마을로 들어가 길가의 풍경을 담아 봤다.
도로 양옆에 펼쳐지는 중세 유럽의 작은 마을들이 보기 좋다.
이곳은 소나 말들이 자유롭게 뛰어 놀법한 풍경인데 동물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지나가는 차가 많지 않아 시원하게 달리며 이국적인 농촌 마을의 정취에 취해본다.
멀리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가는 길에 호엔슈반가우 성이 있다.
호엔슈반가우 성은 루트비히 2세가 태어나 17세까지 자란 성으로, 바이에른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으며 루트비히 2세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시절을 보낸
호엔슈반가우 성을 잊지 못해 많은 시간을 이 성에서 보냈다고 한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노이슈반슈타인 성 못지않게 아름다운 성이다.
호엔슈반가우 성 (Hohenschwangau)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가는 길에 호엔슈반가우 성을 카메라에 담아 본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가는 방법은 3가지이다. 마차, 버스 그리고 튼튼한 두 다리.
뚜벅이는 올라가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주위의 풍경과 많은 관광객들과의 동행은 힘든 느낌을 지워버릴 수 있다.
어느정도 걸으니 노이슈반슈타인 성 윗부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성이 워낙 커 전체를 담을 수 없어 일부분만 찰칵..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ß/Schloss Neuschwanstein)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신 백조 석성'(新白鳥石城)의 의미이며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가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이다.
바이에른의 왕 류트비히 2세의 부왕이었던 막시밀리안 2세는 '백조의 성'이라 불리던 폐성 호엔슈방가우 성을 사들여 고딕 양식으로 개조, 재건축하였고,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가 이곳에서 자랐다. 때문에 루트비히 2세는 어렸을 적부터 건축에 대해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또, 그는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바그너는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토대로 한 오페라 작품들을 썼고, 이 때문에 루트비히는 게르만 민족의 신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호엔슈방가우 성은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모두 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걸맞은 새로운 건축물들을 건설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 기획은 1862년 그가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설하기 전 뮌헨 왕궁의 통로에 바그너가 쓴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장면을 벽화로 그렸다. 그리고 자신의 궁전을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하고, 치엠 호수에 베르사유 궁전을 본딴 궁전을 짓게 하는 등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 때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바그너를 다시 불러 자신에 구상에 가담시켰다. 그러나 대리석 465톤, 기타 석재가 1,550톤, 벽돌 40만개 시멘트 600톤으로 지은 이 성으로 인해 국고가 낭비되어 재정 상황이 좋지 않게 되어, 국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를 축출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일로 루트비히 2세는 의욕상실에 빠졌고, 퇴위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구상을 떠올리면서 다시 생기를 찾았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 바르트부르크 성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이와 같은 성을 호엔슈방가우 성 맞은 편에 지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지역은 지형이 험해, 그의 계획대로 성을 지을 수가 없었다. 이에 성은 당초 계획과 다른 새로운 형태로 수정 계획되었고, 1868년 건설작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루트비히 2세는 교권 강화를 둘러싸고 관료들과 마찰을 빚게 되면서 정치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광적으로 건축에 몰두했다. 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외에도 다른 여러 곳에 건축물을 짓게 되면서 국고를 낭비하고, 수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의료진으로부터 정신병자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왕위에서 퇴위당했고, 퇴위당한 지 3일 만에 슈타른베르거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사인은 자살로 공식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많은 의문점을 낳고 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1892년 완성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성의 완공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대포의 발명으로 성이 이미 쓸모가 없어진 시대였으므로 루트비히 2세는 순수히 취미로서 성을 지은 것이다. 이 순수한 취미 때문에 바이에른 경제는 파탄이 났다[1].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는 성이 관광지 따위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자신이 죽으면 성을 부숴버리라고 유언했다. 물론 성은 관광지로 최고였으므로 부서지지 않고 지금도 바이에른의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되어 있으며,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성도 이 성을 본뜬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또한 루트비히 2세와 같은 말을 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성은 부숴지지 않았다.
정식 명칭은 헝가리공화국(RepublicofHungary)으로, 1989년 10월 23일 헌법 개정으로 헝가리인민공화국(HungarianPeople’sRepublic)에서 바뀐 명칭이다. 면적은 9만 3028㎢, 인구는 989만 7541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부다페스트(Budapest)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마쟈르족으로 96.6%이며, 독일인이 1.6%, 기타 슬로바키아인과 남슬라브인, 루마니아인이 있고, 언어는 민족고유의 마쟈르어를 사용한다. 국민의 67.5%가 가톨릭교를 믿으며, 개신교 20%, 그리스정교 2.6%이다.
기후는 다습한 대륙성기후로서 봄·가을이 짧고 여름에 비가 많이 온다. 경제는 농업 위주였으나, 제2차세계대전 후 공업화에 주력하여 공업생산이 주도하게 되었다. 특히 광업·알루미늄공업·자동차·전자기기 등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주요 자원은 석탄·천연가스·보오크사이트 등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1,37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4450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의원내각제 성격의 공화제로서, 대의기구는 임기 4년의 국민회의(386석)가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사회당(HSPR), 청년민주연합(FIDESZ), 민주포럼(HDF) 등이 있다.
약사
마쟈르족은 9세기 말 러시아로부터 이주해 왔으며 1001년 최초로 독립왕국을 창건한 뒤 13세기부터 몽고·터키·오스트리아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간 화해협정이 성립, 헝가리는 내정상 독립을 회복하였지만 오스트리아 황제를 헝가리 왕으로 섬기는 이중군주국(DualMonarchy)으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형태는 1918년 11월 함부르크 왕조의 해체 시까지 지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동시에 공산지도자 쿤(KuhnBela)의 주도하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4개월만에 붕괴되고, 1920년 3월 왕정복귀 후 헝가리는 국토의 71%, 인구의 60%를 인접국에 양도하게 되어 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5년 4월 4일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종전과 함께 소련 주둔군의 지원으로 공산당이 1949년 5월 정권을 장악하고 8월에는 헌법을 제정하여 스탈린식 강압정책을 채택하고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이후 헌법은 1972·1983·1989년 세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스탈린(Stalin, I. V.)이 죽은 뒤 온건한 나지(Nagy, I.) 수상이 등장하여 자유화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1956년 대규모의 반소인민봉기가 발생하자, 소련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였으며, 그 결과 나지는 축출되고 카다르(Kadar, J.)의 새 정부가 들어섰다.
카다르는 1967년 소련과의 우호조약을 20년간 갱신하는 등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낙후된 경제개발에 주력하여 1968년부터 여러 차례 경제개혁을 실시하였다.
카다르의 신경제제도는 경제정책의 지방분권화, 시장원리에 의한 가격체제, 노동자의 동기 부여, 서구와의 무역확대를 도모함으로써 동구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철저하고 광범위한 자유화정책과 민생중시정책이라 평가되었고, 실제로 경제체제의 진정한 전환을 가져온 유일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 동안 소련의 공산당을 그대로 답습한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1989년 10월 헝가리사회당으로 개칭)은 유일 합법정당으로서 실질적으로 국가와 정부를 통제해 왔으나 1989년의 헌법개정을 통하여 다당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 헌법개정안은 국가원수를 기존의 대통령위원회라는 집단기구 대신 대통령 개인으로 바꾸고 의회에서 간선하도록 하고 있다.
외교정책의 기조는 중도좌경으로 1955년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해체된 바르샤바조약기구(WTO)·공산권경제상호원조회의(CMEA) 등 기존 동맹권으로부터 탈피하여 전통 서유럽에로의 복귀를 국가의 최대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즉 범유럽 집단안보 및 협력체제에 참여하며, 중유럽협력구상(CEI)·중유럽자유무역협정(CEFTA) 등을 통해 주변 국가들과 정치·경제·군사적 유대관계를 긴밀히 하는 것이다.
다만 인접한 루마니아와는 그 나라에 거주하는 마쟈르족(200만 명)의 지위문제를 놓고 불편한 관계에 있다. 또한 헝가리는 1990년 이래 경제정책의 핵심과제인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청산을 통한 시장경제체제로의 정착과 대외무역의 자유화를 정책기조로 각종 경제개혁 및 개방정책을 계속 추진 중이다.
현재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부흥개발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 국제경제협력기구(OECD) 등 경제 관련기구에 가입하여 있다.
오스트리아 빈 국제공항에서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까지의 거리는 약 65 km이며 50분정도 소요된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 있는 브라티슬라바성에서 본 UFO 다리 전경이다.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지지대 위에 둥근 물체가 보인다. UFO 같이 생겨서 UFO 다리라고 명명했나 보다.
브라티슬라바성(城)에서 본 도나우(다뉴브)강 전경이다.
유람선은 아닌 것 같고 커다란 뭔가를 싣고 유유히 다뉴브강을 누비고 있다.
유람선과 화물선이 정박해 있다.
다뉴브강의 원류는 알프스 북부의 해발 1,000m의 슈바르츠발트 산지에서 시작하며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등
여러 국가를 잇는 동서 유럽 문화 및 물자 이동의 대동맥이다.
브라티슬라바 시내 트램 - 사람이 많지 않다.
브라티슬라바 이면도로를 카메라에 담아 본다.
중세 유럽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이 곳은 다소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래서 그런지 관광객들이 많지 않다.
슬로바키아 국립 역사 박물관이다.
슬로바키아 국립 역사 박물관 표지다.
브라티슬라바내 데빈성 일부다.
데빈성 (Devin Castle)
데빈성 (Devin Castle)
구석기시대에 처음으로 요새화되어 켈트족 정착기, 로마시대, 모라비아(Moravia) 대제국 시대에 걸쳐 중요한 군사적 요새가 되었다. 특히 모라비아 시대에는 국경, 행정,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프랑크 왕족의 영토확장에 대항하기 위한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다. 1809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불타 일부가 소실되었다. 1965년 이래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최근5년간 서기1세기의 로마타워 유적, 세라믹 파편, 선사시대 이전의 정착지들이 발견되었다. - 두산 백과 출처
데빈성 주위 산책로다.
가족단위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브라티슬라바 시내에 위치한 한국 슈퍼 (서울프라자)다.
한국에서 공수한 각종 음식류/주류/반찬/스낵류 등을 판매하고 있다.
물론 수입한 물품들이므로 한국보다 가격이 비싸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타트라산으로 가는 길 3시간 40분 거리 (320Km)
슬로바키아 타트라산 전경 - 해발 2,655m 높이의 산이다.
타트라산은 폴란드 남부와 슬로바키아 북부의 국경 부근까지 동서 방향으로 뻗은 산맥이다.
슬로바키아 타트라산에 있는 각국의 이정표다.
대한민국 서울은 수기로 적어 놓은 듯하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니트라 시
슬로바키아 니트라市 전경
79,000명이 살고 있으며 슬로바키아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다.
니트라성에 바라본 시내 전경이다.
니트라성 진입로 전경
니트라성 내부에 있는 각종 조각상들이다.
우연히 들른 니트라에 있는 아이스하키장 내부를 찍어 봤다.
슬로바키아에서 아이스하키는 꽤 인기있는 스포츠란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50분 거리에 있는 트르나바 시
슬로바키아 트르나바市 집 전경
대략 65,000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이다.
슬로바키아
정식 국가 명칭은 슬로바키아공화국(TheSlovakRepublic)이다. 현지어로는 슬로벤스카 레푸블리카(Slovenskárepublika)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체코와 함께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다가 1990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국호를 바꾼 후 1993년 1월 1일 체코공화국에서 분리 독립하여 슬로바키아공화국이 되었다.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이며 2012년 1월 현재 대통령은 2009년 4월에 재선에 성공한이반 가슈파로비치(Ivan Gašparovič)이다. 국회는 단원제이며(150석) 2004년 5월 1일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에 가입했다. 주요 국경일은 8월 30일(혁명 기념일), 9월 1일(헌법 제정일), 11월 17일(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기념일)이다.
중부유럽에 있는 내륙국으로 북쪽으로 폴란드, 서쪽으로 체코, 남쪽으로 헝가리, 동쪽으로 우크라이나, 남서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접해 있다. 면적은 4만 9035㎢로 한반도의 1/4 정도이며, 기후는 대륙성 기후로 여름은 고온 건조하고 겨울은 저온 다습하다. 1월 평균기온은 -1℃~-2℃, 이며 6월 평균기온은 16℃~26℃이다. 2008년 기준으로 총인구는 540만 998명이다. 인구 42만 5000명이 거주하는 수도는 브라티슬라바(Bratislava)로 독일어로는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헝가리어로는 포조니(Pozsony)라고 부른다.
민족 구성은 슬로바키아인(85.8%), 헝가리인(9.7%), 로마인[1.7%(집시)], 기타(1%), 체코인(0.8%) 등이다. 종교는 가톨릭(69%), 개신교(9%), 그리스정교(4%), 무교 또는 기타(9%)로 이루어져 있다. 공용어는 슬로바키아어이고 그 외 헝가리어도 쓴다. 소수의 사립학교를 제외하고 슬로바키아의 모든 학교들은 공립이며, 6세부터 시작하여 9년간은 의무교육이다.
2008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GrossDomesticProduct)은 673억 유로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2만 2600달러이다. 교역은 수출 495억 유로로 전년 대비 5% 증가했으며 수입은 전년 대비 5% 증가한 502억 유로이고 경제성장률은 6.4%, 실업률은 9.6%, 인플레이션율은 4.6%이다. 2009년 1월 1일 유로존(Eurozone)에 가입하여 유로(Euro)화를 쓰고 있다.
한국과는 1990년 3월 22일 체코슬로바키아와 수교한 후에 1993년 1월 1일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 분리에 따라 재수교하였다. 2009년 3월 기준으로 교민은 2000명으로 유럽연합 국가 중 제8위이다. 시차는 한국보다 8시간 늦으며 국제전화 코드는 421이다.
2008년 한국과 교역 총액은 35억 달러로 이 가운데 수출은 34억 달러이고 수입은 8000만 달러이다. 수출 품목은 자동차 부품, 평판디스플레이 및 센서, 영상기기, 컴퓨터, 전선 등이고 수입 품목은 자동차, 원동기 및 펌프, 석유화학제품 등이다. 투자 누계를 살펴보면 한국의 대(對)슬로바키아 투자는 8억 7464만 달러(수출입은행, 2008년 12월 기준)이고 슬로바키아의 대(對)한국 투자는 5만 4000달러(지식경제부, 2008년 12월 기준)이다.
북한과는 1948년 10월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1993년 1월에 남한과 동시에 재수교를 하였다. 북한과의 교역 총액은 2007년 기준으로 119만 2000달러로 이 가운데 대(對)북한 수입이 6만 8000달러, 대(對)북한 수출이 7000달러를 차지한다. 수입 품목은 기계, 장비 등이고 수출 품목은 기계, 원자재 등이다.
체스키크롬로프 (Cesky Ckrumlov)라는 동화에 나옴직한 작은 마을을 사진에 담았다.
체스키크롬로프는 1992년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체코 프라하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약 170Km 떨어진 곳에 동화 마을처럼
조성된 곳이 있다.
체스키크롬로프 (Cesky Ckrumlov) map 이다.
체스키크롬로프 (Cesky Ckrumlov) 위성뷰다.
S자 형태의 블타바 강이 이채롭다.
자연에 의한 것인지 아님 인위적인 공사로 조성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블타바 강 주위로 지어진 건물들이 눈이 띈다
여름이라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마을 사이에 강물이 흘러 보트나 레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마을내 골목 전경이다.
동화에나 나올법한 건물 및 골목이다. 차 한대가 주차해 있어 인상적이다.
모든 건물에 사람이 거주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건물사이를 시원하게 강물이 흐르고 있다.
마을내 성당
마을내 다리다.
건물사이로도 물이 흐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마을내 작은 박물관이다.
마을 성인의 동상인데 이름을 모르겠네요 ㅠㅠ
마을내 유스호스텔이다.
가격은 저렴하고 나름 며칠 지내기 괜찮은 곳이다.
마을내 레스토랑에서 시킨 음식 - 샌드위치에 뭔 소스인데 이름이....
체코 체스키크롬로프 (Cesky Ckrumlov)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200여 km떨어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체스키크룸로프가 있다. S자로 완만하게 흐르는 블타바 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작은 도시로 붉은 지붕과 둥근 탑이 어우러져 동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체코가 공산 국가였던 시절에는 그저 낙후된 도시에 불과했던 체스키크룸로프는 1992년 도시 전체가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300여 개 이상의 건축물이 문화 유적으로 등록되었으니 도시 전체가 유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세기 남 보헤미아의 비테크 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고딕 양식의 성을 짓기 시작한 것이 체스키크룸로프의 시작이다. 이후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건물들이 일부 추가 되었으나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거의 없다. 중세 마을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으로 평가 받고 있다.
13세기 세워진 체스키크룸로프 성은 프라하 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성이다.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하면서 둥근 지붕의 탑과회랑등이 추가 되었다. 성 안에는영주가 살던 궁전과 예배당, 조폐소, 바로크식 극장과 정원이 재현되어 있어 중세 귀족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다. 구시가의 중심지는 중세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스보르노스티 광장으로 주변에 후기 고딕 양식의 성비투스성당등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체스키크룸로프는 다른 중세 도시들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이 좁은 길은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과 카페가 가득해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해마다 6월이면 축제가 열리는데, 마을 사람들 절반 이상이 르네상스 시대의 옷을 입고 거리에서 공연을 한다.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는 바로크 시대의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회나 18세기 귀족들의 가면무도회가 열린다.
영어·프랑스어로는 프라그(Prague), 독일어로는 프라크(Prag)라고 한다. 체코 중서부,블타바강(江:몰다우강) 연변, 라베강(江:엘베강)과의 합류점 가까운 곳에 있다. 체코 최대의 경제·정치·문화의 중심도시이다. 시내를 흐르는 블타바강은 너비가 100~300m이며 몇 개의 강이 있다.
비교적 따뜻하며 습도가 낮고 연 강수량은 508mm이다. 프라하분지에는BC4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슬라브인(人)이 들어온 것은 5·6세기로 9세기 말에 성이 축조되었다.
11세기에는 구(舊)시내 광장에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12세기에는 이미 중부유럽 최대의 도시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14세기에 이르자 카렐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시는 더욱 발전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당시의 인구는 4만으로 추정된다. 14~15세기에는후스전쟁의 싸움터가 되었다.
15~16세기에는 고딕 건축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정치적인 의미는 상실하였다. 17세기에는 바로크 건축이 번성하였고 18세기 말부터 다시 수공업 등이 일어나 경제적으로 회복되어 인구도 8만을 헤아렸다. 그 후에도 인구는 늘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帝國)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하였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이래 수도가 되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후 1948년의 이른바 2월 사건, 1968년 1월의 ‘프라하의 봄’으로 부르는 자유화운동이 소련 등 바르샤바 조약군(軍)의 침입으로 짓밟힌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1993년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어 체코의 수도가 되었다.
공업도시로서의 프라하에는 100여 개의 기업이 있고 전국 공업생산의 10% 가량을 생산한다. 주요한 것은 기계공업으로, 국영기업의CKD(전기기관차등)와 테슬라(모터·방송관계) 등이며 인쇄공업도 중요하다. 식품공업으로는 스미호프의 맥주, 프라하 햄이 유명하고, 그 밖에 의복·제지·화학(주로 타이어) 공업 등이 영위되고 있다. 유럽철도의 대중심지로, 유럽의 각국과 연결되며 하항(河港)이다. 근년에는 항공망의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시는 10개의 구(區)로 나누어져 있으며 교외지역으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 시에는 대통령관저·정부·의회 등의 정부기관 및 국제적인 기관 등을 비롯해서 과학아카데미·프라하대학교(1348)·음악대학·도서관·스트라호프 민족자료관(옛 수도원)·박물관·극장·천문대·스포츠시설 등이 집중해 있다.
서부 독일의 국경 근처, 잘차흐강(江)의 양안(兩岸)에 있는 공업도시이다. 로마시대에 생긴 도시이며, 8세기에 주교청이 설치된 후교회령이 되어 가톨릭 주교가 통치하였고, 가톨릭문화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폭격으로 파괴되었지만 교회와 궁전 등 바로크 건축의 작품이 많이 보존되어 있어 ‘북쪽의 로마’라고 부른다. 지명은 ‘소금의 산’이라는 뜻인데, 이름 그대로 예로부터 소금 산지로서 유명하며, 지금도 이곳의 소금이 전국에 공급되고 있다. 전쟁 후에는 남서부의 카프른에 유럽 최대급의수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W.A.모차르트의 출생지이며, 그를 기념하여 1920년부터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해마다 여름철에 개최된다. 악기·인쇄출판·석재·시멘트·양조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 그로스글로크너산의 동쪽 기슭에는라듐온천지로서 유명한 관광휴양지 바드가슈타인이 있으며, 스키와 스케이트도 성행하여 사시사철 찾는 사람이 많다. 해마다 셀 수 없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이 곳은 모차르트의 생가 외에도 바로크 건축 양식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잘츠부르크 대성당과 잘츠부르크 성,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미라벨 정원(MirabellGarden) 등 볼 거리가 많다. 도시의 동쪽에는 잘츠캄머구트(Salzkammergut)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호수 지대가 있다. 관광과 문화, 대학, 겨울 스포츠의 도시이며 또한 박람회의 도시이기도 하다.BMW와 포드(Ford), 포르쉐(Porsche)등 자동차 회사들이 이 곳에 지사와 공장을 가지고 있고, 많은 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